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옛날이야기 같은데 광주 동명동에 카페나 찻집이 몇 없었을 때 그러니까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면 도서관과 학원이 몇 개 있던 때에 종종 들러서 홍차를 마시던 가게가 있었다. 그 곳에서 처음 마셨던 차는 중국 홍차였는데 메뉴에 쓰여 있던 이름은 랍상소우총이었다. 고른 이유는 메뉴에 스모키한 향 같은 설명이 있었고 그게 어떤 향이고 어떤 맛일지 궁금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그때 쓰여 있던 이름이 정산소종인지 랍상소우총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메뉴판에는 랍상소우총이라 쓰여 있었고 후에 아버지에게 받은 차들이 정산소종이었던 것 같다. 주말 오후였고 날씨가 좋았고 가게 주인 분은 식전이라면 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식후라고 말하고 랍상소우총을 주문했고 이런 맛이 있구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랍상소우총이라는 것을 마셨다고 말하자 그게 정산소종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 오래전이라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윈난성 쿤밍에서 머물며 여러 차창을 다니셨는데 떠올려보면 어릴 때부터 차와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서늘한 방 한 쪽에 대나무로 싸여진 차들이 있었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늘 차를 받아서 갔다. 이전까지는 주로 보이차를 받았지만 랍상소우총이라는 것을 마셔봤는데 맛있었다고 한 이후로는 정산소종을 늘 함께 받았다. 그 이후로 종종 기문이나 오룡차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기숙사와 여러 번의 이사에도 늘 바느질 된 입구를 여미는 형식의 주머니에 다구들을 담아 다녔다. 보통은 제대로 우리지 않고 온도에 맞지 않는 뜨거운 물을 부어두고 일을 하고 책을 읽다 잊거나 너무 많이 넣어서 진하게 마시거나 너무 오래 우린 것을 그냥 마셨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다구들이 있었지만 기문은 큰 컵에 찬 물을 부어두고 몇 시간 뒤에 마실 때도 많았는데 그것도 생각보다 맛있었다. 다 마시면 잎을 씹으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산소종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후로는 마셔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랜만에 정산소종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광주 집에 가면 차를 좀 더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왜 차에 대해 좀 더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이어서 한다. 종종 반복해서 하게 되는 뒤늦은 생각 중 하나. 아무튼 차는 어느 계절에 마셔도 좋지만 보이차는 봄에 어울리는 것 같다. 봄은 활기찬 계절이지만 왠지 모르게 흙먼지 기침 같은 것도 동시에 떠오르는데 그럴 때 보이차를 마시면 몸과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보이차의 맛이 어딘가 흙맛 같기도 해서 그런가. 정산소종은 늦가을에 어울리는 것 같고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것 같다. 향이 인상적이기 때문에 비 오는 날 퍼지는 물 냄새와 함께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금 언제라도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것이 늘 언제나 가장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