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가 물었다. 맛있어? 나는 향이 좋다며 찻잔을 들어 코끝에 대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 때 좋았어?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시 살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야. 나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가끔 그때가 생각나 운다. 어쩔 수 없다. 증오는 기억나지 않고 사랑은 남는다. 차가 식고 있다. 우리 다시 시작할까? 아니. 나는 물을 데워 찻주전자에 따른다. 이제 나는 당신과 섹스하기 싫어. 그는 알고 있다. 그런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그러면 하지 않고 살면 되지. 나는 여러 번 애원했었다. 가만히 팔을 베고 잠들게 해줘. 부탁이야. 그 일로 울면서 밤의 고속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새벽의 휴게소에서 의자를 젖히고 잠든 적이 있다. 나는 찻잔에 떠 있는 찻잎의 아주 작은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건져 혀끝에 옮긴다. 담배는 차의 향을 덮지 못한다. 담배의 연기가 찻잔의 피어 오르는 연기와 다른 것처럼. 담뱃잎을 펼쳐 놓으면 찻잎과 닮아 있기도 해. 우리는 그것을 종이에 말아 불을 붙인다. 담뱃잎을 가득 담은 포대를 어깨에 지고 운반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어깨는 다부지고 기울어 있었다. 그때 기억나지? 우리는 커피를 마시러 가던 중이었잖아. 그는 아니라고 한다. 밥을 먹으러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이제 와 누가 옳은 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차 한 잔 더 줄까? 그는 자신이 따르겠다고 한다. 우리는 좋았지. 그만큼 나빴고. 더없이 서툴렀지. 나는 다시 돌아가서 당신을 처음으로 보고 싶다고 말한다. 유진목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실 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통성명을 했던가? 나는 그의 지난 명함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적힌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는 내가 아주 예쁘다고 했다. 정말일까? 나는 예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얘긴 들어본 적 없었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언제까지 그런 날들이 계속될지 알 수 없어 고단했다. 어쩌다 웃을 때면 미간이 일그러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으로 살려고 애쓸 때였다. 나는 남들 다 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그때는 없던 찻주전자와 찻잎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막차가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에도 문을 여는 프렌차이즈 카페에 가 뜨거운 차를 한 잔 씩 호호 불어 마셨다. 그러면 정신이 맑아지곤 했다. 그런데 그가 차를 따랐던가? 나는 건너편의 빈 잔을 본다. 사실 그는 없다. 차는 나 혼자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