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초상
윤향로 작가
2026.04.24
보통의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나요? 지금 계시는 작업실은 어떤 곳인지, 하루 중 집과 작업실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주말은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주중에는 굉장히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편인 것 같아요. 아이가 있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거의 일정하고요. 보통 아침에 아이와 함께 걸어서 등교한 다음, 저는 운전해서 작업실에 와요. 작업실에 오지 않는 날은 강의하는 날이나 외부에서 미팅이 있는 날이에요. 아이가 학교에서 일상을 보내는 동안 저는 작업을 하는, 반복적인 하루를 매일매일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주말에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주말을 껴서 캠핑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자연과 가까운 일상을 만들고 싶어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에요.
사실 예전의 저였으면 이렇게 규칙적이고 자연에 가까운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상상을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삶의 형태가 아이와 함께하는 것에 맞춰지다 보니,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작업에도 일상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고요.
남기시는 사진이나 글을 보면서, 산책을 많이 하시는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님께 산책은 무엇을 하는 시간이고, 자연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아이가 영유아기일 때는 어떻게든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어요. 그래야 저도 밤에 작업을 하고 업무를 볼 수 있으니까, 그런 데 초점이 더 맞춰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밖으로 무조건 나가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몸을 사용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지냈어요.
또 마침, 이사 온 곳에 산이 굉장히 많기도 했어요. 지역 특성상 산 아래에 천이 흐르기도 하고. 그래서 정말 자연스럽게, ‘집 앞을 탐험해 보자.’는 생각으로 자연을 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 자연이 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어요. 이제는 에너지를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지나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더 느끼고 싶어서 아이랑 계속 밖에 나가는 것 같아요. 시작은 그렇지 않았지만, 결국 크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자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의 작업인 <강>(2025), <연못>(2025), <결로>(2026)를 보며, 자연, 그중에서도 물이라는 대상이 작가님의 일상과 작업 모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작업 노트에도, 집 주변을 산책하며 물을 바라보았던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고요. 작가님께 물이란 무엇인가요? 물이 작가님의 마음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아이의 아빠가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되어서, 아빠가 어디 있냐고 아이가 물었을 때, 아이 눈높이에 맞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어요. 아이 두 살 때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하늘나라로 가는 것 이상으로 아이가 궁금해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빠를 바다에 보내줬다고 이야기해 줬어요. 그렇게 이야기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빠가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 하셔서, 돌아가시고라도 자유롭게 다녔으면 해서, 아빠를 바다에 보내드렸어.’라고. 그게 아이 다섯 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아이가 문득, “엄마, 그러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물에도, 우리 집 앞에 흐르는 물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도 아빠가 있겠네?”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때는 아빠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스스로 들었나 봐요.
그때부터 제게 물이라는 대상이 너무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사실 과학적으로 물은, 지구 근처에서, 지구 안에서 계속 순환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건데. 그걸 아이의 말로 깨달았던 것 같아요. 모든 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물이라는 대상이 조금 더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강>과 <연못>이라는 작업은, 강에 관한 생각으로 떠올리게 되었어요. 강에 들어가 한 자리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면, 계속 강이 흐를 텐데, 그렇게 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이라는 대상은 결국 다시 또 같은 대상인 것이고. 이런 것들이 제게 좀 이상하고 신기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계속해서 변화하는 동시에 같다는 것.
스스로를 마주하게 만드는 것에는 사람, 공간, 어떠한 일이나 시간 등 다양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스스로를 마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었던 계기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요?
작업을 하면서도 저는 저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되게 오랜 시간 동안. 학생 때부터 작업을 시작하면서, 저는 저에게 관심이 있기보다 외부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회화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어떤 방식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작업하는 데 집중했으니까. 그래서 그것을 보기 위한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든지, 주변, 시대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진다든지. 저를 둘러싼, 저 이외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지, 저한테는 사실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슴 아프게 이별하면서, 그 계기로 저를 강제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보고 싶어서 봤다기보다는, 주변 상황들 때문에 저를 돌아봐야 했던 것 같고.
사실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는 데 가장 큰 계기가 된 건, 양육과 육아였던 것 같아요. 아이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느냐, 무슨 말을 뱉느냐,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너무 즉각적으로 영향받고, 반응하는 대상이다 보니까. 조금 더 나를 가다듬고,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챙겨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에 대해서 관심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된 여러 가지 계기가 어린 시절에 있긴 하지만. 저한테는 정말, 말하다 보니까 깨닫는 건데, 인간을 한 명 키운다는 게 굉장히 큰 의미이긴 한 것 같네요.
스스로를 마주하는 일은, 작가님께 어떤 감정과 감각을 불러일으키나요?
‘시간이 지나면 아픔은 다 사라져.’ 이런 말들을 모두가 하는데. 반대로도, 모든 사람이 하는 말과 같은 것 같아요.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고. 만약 내가 전신 화상을 입는다면, 그 화상의 상처가 결국 어떤 형태로든 남는 것처럼. 내가 가지고 가는 일부가 된 것 같고. 그것을 좀 더 잘 다스리고 다루게 되는 스킬 같은 것은 생기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그런데 얼마 전에 아이가, ‘엄마는 나와의 추억이 더 많아, 아빠와의 추억이 많아?’라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사실 저는 그 시간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몇 년이 지났는지, 헤아리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 질문을 듣고 아이와 함께 헤아려보니, 아이를 만나서 아이와 보낸 시간이 일전에 가졌던 다른 시간보다 이제 막 길어지기 시작했더라고요. 그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내가 너무, 나 스스로를 고통 속에 혹은 슬픔 속에 놔둘 필요는 없겠구나.’ 저 혼자였다면 이런 생각을 스스로 못 했을 것 같은데,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아이에게 영향을 받고. 무언가 이전과는 굉장히 다른 경험과 계기를 갖게 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께 작업과 일상은 어떤 관계인가요? 작업과 일상 사이의 거리, 혹은 상호작용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이에 따른 변화가 있다면 어떤 변화인지, 그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여쭤보고 싶어요.
결혼을 하기 전이나 아이를 낳기 전에, 작업 과정을 떠올려보면 저는 일상적인 경험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경험 안에서 흡수한 것을 작업으로 다루고.
그런데 지금은 저의 모든 일상의 경험이나 시간이 아이와 공유되다 보니, 그 시간 안에서 당연히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루는 24시간이고, 그 시간 안에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해 해야 하는 일들도 있고, 아이를 위해서 해야하는 것도 있고. 누구나 한정적인 시간 안에 있긴 하지만, 그 시간을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쓸 수는 없고, 어쨌든 공유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까. 그게 너무 일상이 되기도 했어요. 저는 너무 대단한 것에 대해서 영감을 받는 편은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 물을 따르고 그 물컵을 바라봤을 때,와 같은 정말 사소한 경험들. 일상적으로 특별할 게 없는 경험에서, 저의 작업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저 나름대로 회화라는 것에 대한, 내가 할 수 있는 회화라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에 경험들이 더해지다 보니 작업의 방향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아요. 만약 일전에, 혼자만의 집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작업을 했던 기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육아를 하면서 혹은 내가 타인을 돌보면서 무언가를 해야만 할 때, 새로운 창작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이런 생각을 처음 해 봤는데, 불가능했을 것 같기는 해요. 제가 일부러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제가 고민하고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거기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되고 변화하고.
앞으로의 저의 역할은 이것을 잘 정리하는 것일 것 같아요. 지금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 펼쳐놓고만 있거든요. 그래서 차근차근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면, 그래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금 더 확실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비선형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이 작업의 기저에서 긴밀히 연결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미래: 하늘과 뿌리를 위한 지도>(2024), <오이스터>(2025)와 연결 지어, 시간에 대해 여쭈어보고 싶었어요. 시간에 대한 관심은,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나요? 작가님께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미래를 떠올릴 땐, 어떤 마음과 감정, 생각으로 바라보시게 되나요?
처음 시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책도 찾아보고, 어떤 방식으로 정의되는지에 대해 탐독한 계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저는 과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거나, ‘내가 예전에는 어땠는데.’라는 생각을 하거나, 과거를 추억하고 염두에 두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 의지가 아닌 타의로, 과거를 계속해서 복기해야 하는 기간이 길게 있었어요. 실제로, 물리적으로 제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계속해서 돌아봐야 하는 순간들이.
그러면서 저 스스로에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너무 이상한 방식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내가 알기로는 분명히, 시간은 지나가고 흐르고, 현재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것인데. 이런 식의 개념들이 모두 다 어그러지는 시점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도대체 과학자들은 시간을 무어라고 이야기하나, 너무 궁금했고. 카를로 노벨리의 책《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도 이때 추천 받아서 보게 되었고요.
저는 시간이 굉장히 분명하고 또렷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결국 인간이 한 약속이고…. 그때부터 시간에 대한 저의 인식과 이해가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변화가 생기면서,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이 시간을 인식해야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도달하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미래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그래서《미래》라는 전시를 하게 되었고. 그 고민을 바라보는 저의 태도나 그 고민에 대해서 관람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때는 작업을 천장에 설치했었는데요. 관람객들이 저와 같은, 작가와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각자의 경험을 할 수 있게. 작업을 바라보는 위치나 작업이 놓이는 위치 같은 것들을 조금 다르게 설정했어요.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험으로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근데 <미래>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사실, 시간이 무엇이고 미래가 무엇이다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봐야 하는 건 미래다.’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도 계속해서 과거를 강제로 봐야만 했고, 과거에 대해서 계속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저에겐 너무 괴로웠는데.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저에게는 작업과 일이 있고, 성장을 도와줘야 할 아이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가 저한테 너무나 크게 다가왔고 그래서 ‘미래’라는 제목의 작업과 전시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미래를 봤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 같은 건 생긴 것 같아요. 무언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형상, 이미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결의 같은 게 생겼달까? 결심이나. 그것을 계속해서 지켜 나가는 게, 저의 몫인 것 같아요. 그게 미래이고.
좋아하는 초상은 어떤 작품인가요? 그 초상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 Autoritratto in veste di Pittura>를 좋아해요. 그 작업은 사실,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 회화를 전공했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자화상이에요. 작업뿐만 아니라, 젠틸레스키가 살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작가가 가진 위치나 작업에 대한 태도가 역사적으로 너무 중요하기도 하고. 그래서 원래 크게 감흥은 없었어요, 너무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2020년에《캔버스들》이라는 개인전에서,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때 만들고 싶었던 자화상은 저의 외형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저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상황이나 조건들을 회화의 레이어로 구성한 자화상이었고요. 그러면서 여성 화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그려냈는지를 다시 한번 찾아보게 되었고, 그게 젠틸레스키의 여러 자화상을 다시 살펴볼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 특히 관심이 생겼던 자화상은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을 그리는 젠틸레스키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그 작품을 봤을 때 느꼈던 여러 심상을 저도 다른 형태의 작업으로 공유하고 싶었어요.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제목의 영향도 너무 크고요. ‘회화의 알레고리라니! 회화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그리다니!’ 하는 약간의 벅참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 같고. 사실 당대의 회화는 여러 측면에서 지금의 회화와 매우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의 회화적 태도를 어떤 식으로 설정하고자 하는지가 화면 안에서 너무 강하게 보여서, 제게 감명 깊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먼 미래에 누군가 작가님의 초상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시나요?
저는 제 작업이, 제가 죽은 후에 어떤 식으로 먼 미래에 남아 있을지 아니면 누군가가 바라볼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런데 저도 포트폴리오로, 아주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제 작업을 보면, ‘굉장히 다른 것들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거든요. 제 작업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목격한 사람이라면 작업들이 왜 이렇게 변화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재 작업을 보고, 2010년 초반의 작업을 보는 식으로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제 작업을 표면으로만 보면, 한 작가의 작업인지 인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겠다는 생각도 종종 들어요.
그래서 만약 제가 죽고 세상에 제 작업이 남아 있다면, ‘이 작가가 이런 시간대에 이런 것들을 그려냈고 이런 작업을 했구나.’ 하고 작업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작업을 잘 해야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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